004. 러시아 제국의 영토 확장 1
19세기 초엽의 중앙아시아 토막 지도. 우즈베키스탄은 당시 코칸드(Kokand), 부하라(Bukhara), 히바(Khiva) 라는 세 개의 칸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시르다리야의 북쪽은 카자흐족이나 키르기즈족이, 카라쿰 사막에는 사납고 강인한 투르크멘족이 있었다.
히바를 둘러싼 성벽, 근대 무기 앞에서는 이러한 성벽이 무력했기에 이렇다 할 전투도 없이 히바의 칸은 항복했다.
19세기 유럽 군대의 주 무기는 화기를 사용한 보병군단이었다.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략했을 당시, 맘루크 왕조(Mamālīk al-ʻIrāq) 1의 기마 군단이 속수무책이었던 것처럼 중앙아시아 또한 근대적인 러시아 군에 대적할 수 없었다. 2
그러나 중앙아시아는 넓은 지역으로, 산악 지대·사막 지대와 같은 자연 요새를 뚫고 쳐들어오는 것은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군은 자국의 지배 지역에 몇 개의 전략 지점을 두어 점차 중앙아시아에 지반을 굳혀 나갔다.
1912년에 카자흐스탄을 제압하여 러시아의 행정 지배는 카자흐 초원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 해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으로 인해 러시아 국내의 혼란이 가중되어 러시아의 확대 정책은 일시적으로 멈추게 되었다.
그 즈음, 러시아의 확실한 지배 영역은 겨우 우랄 산맥을 넘은 부근이었기에 우랄 강의 오렌부르크가 중앙아시아 진출의 거점이 되었다. 러시아는 카자흐족을 정주화시키는 둥 식민지화를 강력하게 밀고나갔다.
당시 러시아의 골칫거리는 러시아의 대상(隊商)을 습격해 상품을 약탈해가는 둥 난폭하게 구는 히바 칸국이었다. 또한, 카라쿰 사막에 근거지를 둔 투르크멘족은 러시아인을 납치해 히바의 시장에 노예로 팔아넘기기도 했다. 3
1836년, 오렌부르크에서는 히바의 대상(隊商)을 전원 집합시키고 체포·수감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히바 칸국이 러시아인 노예를 전부 해방시키지 않는다면 대상의 석방에도 응하지 않겠다며 강경하게 나섰다. 히바는 어영부영 소수의 잉여 노예만을 해방시켜 무마하려 하였다.
1839년, 러시아군은 무력으로 히바 제압에 나섰다. 아랄 해의 남쪽, 중앙아시아 사막에서 바다에 떠 있는 섬과 같은 히바는 자연 요새로부터 지켜지고 있어, 군대를 전진시키는 것이 어려웠다. 서쪽의 카라쿰도 북쪽의 키질쿰도 식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러시아 원정대는 오렌부르크 남동쪽으로 2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오르스크(Orsk) 성채에서 출진했다.
히바까지는 약 1600km, 그 중 400km는 물도 없는 키질쿰 사막을 통과해야 했다. 그러나 그 해 겨울, 많은 강설량에 더하여 영하 30도의 한파가 원정대를 습격했다. 지속적인 낙타의 낙오와 함께 병사들 또한 병이 만연한 상태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철퇴하게 된다. 그러나 히바의 칸은 러시아의 진군 시도에 위협을 느껴, 러시아인 노예를 해방해 수년 간은 친밀한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1865년, 러시아군은 사마르칸트에서 북동쪽으로 3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요충지인 타슈켄트를 공략했다. 그 이듬해에 러시아 군은 4만의 부하라 군을 격파하고, 후잔트(Khujand)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로 인해 부하라와 코칸드 간의 교통이 차단되었고, 코칸드 칸국의 운명은 분명해졌다.
1876년, 타쉬켄트에 투르키스탄 총독부가 설치되고,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경영이 시작된다. 1868년에는 사마르칸트를 함락시켰고, 부하라 칸국은 나라의 형태만 잔존한 채 제정 러시아의 보호국이 되었다.
출처 : 桜小路(sakura kouji)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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